사진·Picture/여행

Fatima-CabodaLoca-Sintra, Portugal 9/22~23/2018 #2

NaNo+AlphaGo 2018. 12. 12. 07:35


왕실 가족의 계보도

놀라울 정도의 정교한 타일 조각과..

전복 껍질등을 혼합한 독특한 문양들로 가득찬 어느 방 의 모습

사진 각도를 잡기가 쉽지않은 욕실로 타일에 그린 그림이 볼거리입니다


이러한 각종 고대 문양들은 현대의 다양한 패션 디자인으로 모방되어 각종 상품들로 재 탄생되고 있습니다

책장에 조긱된 놀라운 조각품에 절로 머리가 흔들립니다



천정의 모습인데..

언듯 보았을때는 천정에 새겨진 조각으로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입체 그림으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3층 에서 내려다 보는 Pena 성 의 구조

외벽에 조각되어 붙여진 타일 세공 문양이 또 하나의 하잇라잇 입니다


이곳 페나 성을 축소해 만들어 전시해 놓은 모형도

성의 모서리에 부분 부분 만들어 놓은 망루(경비초소) 의 화려한 건축술의 모습

성의 뒷편으로는 자연 그대로의 바위 위에 수직의 절벽으로 건축된 모습입니다


신트라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폴투갈 전통 식당을 찾아가니 초상화 속의 주인공인 식당 주인이 직접 서브를 해줍니다

Restaurante Dom Pipas : restaurantedompipas.pt

식당 주인의 강력 추천한 와인으로 지금도 이 와인의 맛을 잊을수 없어 Post 합니다, 가격은 무려 $12 정도입니다.

한국식 죽 같기도하고..

노가리 구이 같기도하고..

비빔밥 같기도하고..

중국식 팔보채를 닮은 전통 폴투갈식 요리상 입니다, 맛은 다시 오고 싶을정도였습니다

비수기에 밤이되니 분위기도 기온도 함께 썰렁합니다

이곳 신트라에서 1박2일의 일정으로 빠듯한 시간속에 다음날 일찍 서둘러 두세곳의 유적지를 찾아나서며 

그중 첫번째로 어제 방문했던 Pena 성 옆에 위치한 Moorish Castle(무어인 의 성)으로 향합니다.


포르투갈 리스보아주(Distrito de Lisboa) 신트라(Sintra) 시의 상페드루드페나페힝 구(freguesia de São Pedro de Penaferrim)에 있는 

중세시대의 성으로 신트라산맥에 속한 해발 420m 높이의 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습니다. 카스텔루두스모루스(Castelo dos Mouros)는 

포르투갈어로 ‘무어인의 성(Castle of the Moors)’이라는 뜻으로. 포르투갈의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신트라의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 of Sintra)’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성은 8~9세기 무렵에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반도로 건너온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들이 세웠고,

신트라 일대를 지배하던 무어인들은 산 위에 방어 거점으로서 성을 세우고, 총독은 산 아래 오늘날의 

신트라궁(Palácio Nacional de Sintra)이 있는 자리에 궁을 세워 거주했습니다.


무어인의 성은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기 위해 벌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 

과정에서 이슬람 세력의 주요 방어 거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1147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Afonso I de Portugal)가 

제2차 십자군 세력과 연합하여 리스본을 공격해 장악한 뒤에 기독교 세력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그 뒤 기독교 세력은 무어인들이 방어 거점으로 삼았던 성벽 안에 예배당을 세웠고, 아폰수 1세의 아들인 산슈 1세(Sancho I de Portugal)는 

이것을 증축하였으며. 그러면서 무어인의 성은 신트라의 상 페드루 교구(freguesia de São Pedro)의 본당으로 쓰였고, 

페르난두 1세(Fernando I de Portugal) 때인 1375년에는 개축이 이루어졌다고합니다.


하지만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산 아래 마을에 교구의 본당이 새롭게 세워지면서 무어인의 성은 더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으며,한때 유대인들이 이곳을 예배당으로 사용했지만, 1496년 마누엘 1세(Manuel I)가 유대인들을 추방하면서 성은 방치되어 점차 폐허가 되었습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때에도 무어인의 성은 많은 손상을 입었습니다.


성은 19세기 중엽부터 점차 복원되기 시작했고, 마리아 2세(Maria II)와 결혼해서 포르투갈의 공동통치자가 된 페르난두 2세(Fernando II)는 

1840년대에 들어서 신트라산의 정상부에 페나궁(Palácio da Pena)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무어인의 성도 함께 복원했습니다. 

그 뒤 이 일대가 포르투갈 왕가의 여름철 휴양지로 사용되면서, 성의 보수와 개축은 20세기 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무어인의 성은 신트라 산지의 북쪽 사면에 있으며, 가파른 절벽을 따라서 450m 정도 성벽이 이어져 있습니다.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습니다.곳곳에 여러 개의 탑이 세워져 있으며, 지하에는 6m 깊이의 물 저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예배당에서는 13세기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포르투갈 정부는 1996년 무어인의 성을 특별보호구역

(Zona Especial de Protecção)으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출처:두산백과)

이 성은 이슬람 이베리아 시대에 주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어 인들이 

 8~9 세기에 영토의 중심지인 이곳에 건축했다고 합니다. 

무어인이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슬람교도들을 지칭하는 명칭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 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신트라의 전망은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 이기도 합니다, 

사실 신트라는 이름난 관광지 이긴하나 작은 시골마을에 가깝습니다.

지척에 있는 페나성과 무어인의 성은 여러면에서 대비되는데, 건축된 시기(8세기 vs 19세기), 만든 사람들(포르투갈인 vs 무어인)도 

다르지만 무엇보다도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진한 파스텔톤의 강렬한 색깔과 독특한 외관으로 동화같은 매력을 풍기는 

페나성에 비해 무어인의 성은 남성적이고 근엄하며 장중하게 느껴집니다. 

무어인의 성에서 내려다 본 원뿔모양의 신트라 궁전의(중앙) 모습으로 포르투갈 왕실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된 왕궁입이다.

원뿔 모양의 굴뚝이 신트라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정면은 이 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망루로 이 성의 목적과 달리 현재는 사실 전망대의 용도라 할수있습니다

사진의 중앙부를 보면 자연 그대로의 암반위에 성벽을 축조했는데, 이 점이 일반의 다른 성 과의 큰 차이점 이기도합니다

오른쪽으로 페나성이 보입니다

각각의 지점에 서로 다른 문양의 깃발들이 있는데 이는 이곳을 정복했던 정복자들의 국기 라고 합니다

이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망루입니다

 오른쪽에십자가 형태의 깃발은 엔리께 백작(Henrique de Borgonha)이 무어인과 전투를 하던 1095년에 제정한 것으로 

이 성에서 나부끼는 여러 시대의 국기들 중 가장 오래된 깃발이라고 합니다. 엔리께 백작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을 축출한 후 포르투갈 독립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바로 남쪽으로 페나 성이 더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느낌의 건축물 두곳을 만나게 되는 재미가 아주 특별한데, 많은 사람들은 시간에 쫒겨 페나성 한곳만 보고 

이 지역을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가능하면 시간을 할애해 무어인의 성과 아래쪽에 위치한 헤겔레인아 별장을 꼭 방문해보기를 권합니다, 




현재는 전망대와 다름없이 이용되고 있는 이곳에서 무어인의 성과 신트라 시가지를 함께 내려다 본 모습입니다

무어인의 성을 나와 두개의 원뿔형 탑이 있는 "신트라 궁전"으로 내려와 왕궁 내부를 둘러 보기로 합니다


신트라궁은 중세 포르투갈 왕국의 왕궁으로 리스보아주(Distrito de Lisboa) 신트라(Sintra) 시의 상마르티뇨 구(freguesia de São Martinho)에 있다. 오랜 기간 포르투갈 왕실의 여름철 별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별장 궁전’이라는 의미의 ‘팔라시오다빌라(Palácio da Vila)’라고도 

불린다. 1995년 ‘신트라의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 of Sintra)’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트라궁은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포르투갈 왕실이 사용했으며 보존도 잘 되어 있다. 그리고 15세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장과 보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딕ㆍ이슬람ㆍ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이국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특히 천장이나 벽 등에 그려진 그림들 때문에 

백조의 방(Sala dos Cisnes)ㆍ까치의 방(Sala das Pegas)ㆍ문장의 방(Sala dos Brasões)ㆍ인어의 방(Sala das Sereias) 등으로 

불리는 방의 내부는 포르투갈의 독특한 양식을 나타내며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신트라는 1147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Afonso I de Portugal)가 제2차 십자군 세력과 연합하여 리스본을 장악한 뒤에 기독교 세력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포르투갈 왕국이 이곳을 지배하였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신트라궁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15세기 초 주앙 1세(João I)의 

시대 이후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15세기 이전의 건축물은 14세기 초 디니스 1세(Dinis I) 때에 지어진 왕실 예배당(Capela Palatina)만 

남아 있다.

주앙 1세는 1415년 신트라궁을 새롭게 짓기 시작했고, 마누엘 1세(Manuel I)는 1497년부터 대항해시대에 해외교역으로 거두어들인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건물을 증설하고 화려한 장식들을 추가했다. 이 작업은 마누엘 1세가 죽은 뒤에도 1530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고딕ㆍ르네상스ㆍ

이슬람 양식이 혼합되어 마누엘양식(estilo manuelino)이라고 불리는 포르투갈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등장시켰다. 특히 마누엘 1세 때에 

신트라궁의 내부는 아줄레주(azulejo)라고 불리는 착색 타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는데,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이러한 

장식은 점차 다른 건축물에도 확산되면서 포르투갈 건축양식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게 되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신트라궁도 피해를 입어 아랍인의 방(Sala dos Árabes)의 탑 등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마리아 1세(Maria I)가 궁을 보수하면서 신트라궁은 새롭게 복구되었다.

19세기에도 신트라궁은 포르투갈 왕실의 별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카를루스 1세(Carlos I)의 왕비인 아멜리아(Amélia de Orleães)는 

신트라궁을 즐겨 찾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10년 공화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궁은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1940년대에 건축가 

하울 리누(Raul Lino da Silva)가 다른 궁전에서 오래된 가구를 옮겨오고 장식 등을 복원해서 과거의 화려함을 되살렸다. 

그 뒤 신트라궁은 포르투갈의 중요한 문화 유적일 뿐 아니라,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 (출처:두산백과)

신트라 국립 궁전의 정면 모습으로 외부의 모습만으로는 왕궁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건물의 외관입니다

궁전에 들어와 첫번째로 마주하게 되는 백조의 방(Sala dos Cisnes)에서 놀라울 정도로 세밀한 천정화에 

시선을 빼앗기게 되는데, 마뉴엘 양식이며 천장에 그려진 백조의 그림이 관람 포인트입니다.

왕실의 만찬장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