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 로 감옥 [Hoa Lo Prison]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 지배자들이 건설한 호아 로 감옥은 대부분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프랑스인들이 '메종 상트랄'라고
불렀던 이 감옥은, 전에는 '호아 로'(화로)라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흙 난로를 제조하는 데에 쓰였던 길 위에 지어졌다.
감옥은 두터운 노란색 돌로 지은 건물들 안에 있었다. 입구임을 알리는 위압적인 검은 문은 지역 주민들로부터 '괴물의 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감옥의 벽 뒤에서는 처음에는 프랑스인들의 손으로, 그 뒤에는 베트남인들의 손으로 죄수들에 대한 고문과 학대가 자행되었다.
북 베트남이 독립한 후, 이 감옥은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 전쟁 포로들(대부분 공군)을 수용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공산당의 전 서기장 도 무오이 역시 예전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는 1945년 100명의 다른 재소자들과 더불어 하수도를 통해 탈옥했다. 미군 전쟁 포로들은 1964년부터 수감되기 시작했고, 감옥은 1973년까지 쓰였다. 감옥은 '하노이 힐튼'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아마 가장
유명한 재소자는 미국 상원위원 존 맥케인이었을 것이다. 간수들은 재소자들을 침대에 족쇄로 묶었으며,
제네바 협약을 어기고 고문과 학대를 가했다.
1913년에는 615명의 죄수들이 있었으나, 1953년이 되자 죄수들의 수는 2천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들 대부분은 베트민(프랑스 지배 아래에서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이끈 조직)의 일원들이었으며,
뜰에 설치된 기요틴이 정기적으로 목을 잘랐다.
1993년 싱가포르 사업가들이 하노이 타워를 짓기 위해 감옥 대부분을 헐어 버렸다. 오늘날 남아 있는 부분은,
프랑스 지배 하에서 베트남인들이 고통 받았던 상황에 대부분 초점을 맞춘 박물관이 되었다.
베트남 수상인형극장[Water Puppetry]
수상인형극 인형의 베트남 이름은 ‘무어 로이 느억(Múa Rối Nước)’이다. ‘물에서 춤추는 인형들’이란 뜻이다. 인형의 발 아랫부분은
물속에 있고, 발 윗부분은 물 위에 나와 있는 특이한 형태의 공연이다. 인형이 물에 떠서 펼치는 공연인 셈이다.
인형술사들은 인형과 한참 떨어진 곳 대나무 장막 뒤에서 물에 몸을 담근 채 공연을 이끌어 나간다.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인형을 어떻게
조종하는 것일까? 끈으로 조종하는 마리오네트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베트남의 수상인형극 인형은 각 인형의
발아래에 받침대가 있다. 이 받침대가 긴 대나무와 끈 등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베트남 수상인형극의 인형술사들은 자신들이 조종하는 인형처럼 그들도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열심히 대나무 막대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공연을 이끌어 나간다.물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술사들, 인형은 그 높이가 보통 30~100㎝, 무게도 1~5㎏에 이른다.
긴 대나무가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걸로 조종하는 것은 쉽지 않을 터이다. 놀랍게도 베트남 수상인형극의 인형 조종 기술은
수 세기 동안 베일에 싸여 있다.
수상인형극은 민속음악을 배경으로 인형들이 벌이는 마임의 형태다. 대사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장면 장면에 시각적인 효과를 더해 재미를 주는 것이다. 인형극에 많이 쓰이는 장면 중 ‘요정들의 춤’을 보면 음악, 프롤로그와 함께 두 명의 화려한 요정이 스크린 뒤에서 나타나 우아한 춤을 추다가 스크린 뒤로 홀연히 사라진다. 그러면 다시 여덟 명의 요정들이 쌍을 이뤄 등장해 춤추거나 악기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물을 박차는 용’ 장면에서는 화려하게 장식된 용 인형이 무대에서 몸을 꼬고 돌리면서 물을 박차고 머리를 위로 향해 수면을 가로지르며 헤엄친다. 수상인형극들의 장면은 보통 1~7분 사이로 짧고 이 장면들이 모여 극을 이룬다. 농부들이 논밭에서 쟁기질을 하는 모습, 또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는 모습과 자잘한 소동들, ‘신성한 네 동물들’이라 여기는 금빛 거북이와 용과 유니콘과 불사조의 춤, 사자의 공 싸움, 레슬링, 경마,
가마 운반, 오리를 지켜주려는 노부부의 몸짓······. 이런 풍경들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악사들은 극적 효과를 더해준다. 베트남의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은 공연에 리듬감을 불어넣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선사한다. 가끔은 인형 캐릭터들의 행동에 추임새를 넣어주는 역할도 한다. 악단이 연주하는 곡은 대체로 ‘뜨엉(Tuong)’과 ‘째오(Cheo)’다. ‘뜨엉’과 ‘째오’는 일종의 민속음악인데 ‘뜨엉’은 주로 베트남 중부, ‘째오’는 베트남 북부에서 전해져온 것들이다. 여기에는 많은 사연을 지닌 노랫말들이 있어서,
수상인형극이 아니더라도 ‘뜨엉’과 ‘째오’ 공연이 따로 있다.
베트남 수상인형극은 많은 스토리를 뜨엉과 째오에서 빌려와 인형극화한 것이다. 간혹 신화나 전설, 역사에서 이야기를 차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인형극의 주인공들은 그저 평범한 ‘나’와 ‘너’, 그리고 ‘이웃’이다.
베트남 수상인형극의 인형들은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한 대목에서처럼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표정이 눈길을 끈다. 가늘어진 눈으로 기쁨에 겨워 웃는 사람, 고기를 잡는 어부, 악기를 켜는 사람, 불룩한 배를 내밀고 호방하게 웃는 사람, 그리고
선녀의 모습을 한 여성······. 우리네 시골 마을에 가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옷차림, 그리고 얼굴과 표정, 꾸밈없는 주역들.
그래서인지 더 정감이 간다.
농사를 지으며 오늘 하루 날씨가 좋기를 바라고 그래서 풍작을 거두거나 물고기를 많이 잡길 바라는, 평범한 이웃의 이야기. 수세기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소리 없이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 온 것이 바로 베트남 수상인형극의 힘이다.
베트남 수상인형극이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벼농사가 발달한 베트남 북부 홍강(Hong River)의 삼각주 지역에서 농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중국에서 비슷한 공연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재 중국에 그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세계에서 유일한 형태의 독창적인 공연인 것이다.
이 형태의 공연이 11세기 왕궁에서 왕의 공적을 찬양할 목적으로 이뤄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4세기까지 크게 발전한 수상인형극은 점차
마을 축제와 특별한 의식에 빈번하게 등장했다. 베트남, 그것도 북부의 홍강 델타 지역에서 수상인형극이 발달한 데는 벼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생활이 큰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은 태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쌀 수출국이다. 가끔은 1위까지 넘볼 정도로 쌀 생산량이 풍부한 나라다. 삼모작이 가능해 늘 풍요로운 쌀은 베트남의 축복이었다. 벼농사에 생존이 달려 있는 만큼 물이 중요했다. 특히 마을의 연못이나 호수는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물을 넉넉히 대주고 평소에 사람이 마실 물도 제공했다. 그래서 초기 수상인형극은 마을의 연못이나 호수, 물이 찬 논에서 펼쳐졌다고 전해진다.
관객들은 호수나 연못, 논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인형극을 펼치는 사람들은 관객들이 앉은 자리에서 떨어진 건너편 물속에서 인형을
조종했다. 지금의 대나무 장막이 하던 일종의 가리개 역할은 자연환경이 대신했다.
자연은 수상인형극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공했다. 때문에 인공적 장치 없이 자연을 이용해 공연을 펼쳤다. 무대 장치도 유연했다. 공연에
필요한 소품들도 모두 자연에 있었다. 인형이나 무대 소품을 숨길 때면 덤불이나 툭 튀어나온 바위 등을 활용했다. 이 자연의 무대에서
어려움이 있다면 인형들을 조종하는 동안 거머리들의 공격을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인형의 소재는 북부 베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화과나무였다. 베트남 농부들은 무화과를 다양하게 활용했다. 나무의 어린잎은 돼지 사료로 쓰고 무화과 열매는 물고기 밥으로 주었다. 소금에 절인 열매는 농부의 허기를 달래는 소박한 ‘끼니’였다. 나무가 5~6년쯤 자라면 나무의
몸통은 20~25㎝가 되고 나무 속성도 부드러워져 다루기에 좋다. 이 나무로 인형 모양을 만든 후 옻칠을 한다.
옻칠은 나무가 물에 젖어도 쉬 상하지 않게 한다.
자연에서 나무를 깎아 인형을 만들고 주변에 풍부하게 존재하던 물에서 공연을 해오던 옛 전통이 1000년을 이어져 온 것이다.
원래 직업적으로 인형을 만들거나, 공연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그저 농민들이 하루하루 열심히 농사를 짓다가
틈틈이 인형을 만들었다. 그러다 파종, 모심기, 수확 등 농사의 중요한 시기에 열리는 축제 때 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상인형극도 조금씩 변화를 겪었다. 원래는 마임 형식으로 진행되던 극이었다. 그러다 공연 시작 전에 배역 중
하나인 떼우(Tếu)를 사회자처럼 먼저 등장시켜 그의 입을 빌어 극을 소개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동물이나 인물을 나타내는 소품을 특정 장면에서 실제 동물이나 사람으로 바꾸는 기법으로 관객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수상인형극이 발전해온 데는 베트남의 끈끈한 공동체 문화도 한몫을 했다. 현대 들어서는 수상인형극이 널리 알려지면서 대도시로
확산되고 해외 공연까지 하게 됐지만 수상인형극은 대체로 마을 단위로 이루어졌다.
베트남에는 전통적으로 다양한 길드가 있었다. 수상인형극 길드도 그중 하나다. 보통 마을 이름을 딴 길드는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된다. 수상인형극 길드의 경우 다른 길드와 차별화되는 기술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공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길드나 공동체의 비밀 유지를 위해 ‘아버지를
비롯한 삼대(三代)의 목숨’을 거는 가입 선서를 해야 할 정도였다. 옛날에는 여자 회원이 거의 없었다. 인형을 움직이는 힘이 약하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지만 길드의 비밀이 시가(媤家)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수상인형극의 비밀이 중요시됐다.
17~18세기 수상인형극 인형은 주민 회관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공동체 문화를 나누던 공간으로 수상인형극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상인형극이 지금처럼 발전해 온 데는 종교나 정치적 이념,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애를 받지 않았던 특성도 큰 몫을 했다.
주제 선택, 표현 방법 등은 자유롭게 선택됐다. 공동체의 정체성이 그 선택의 중요한 요소일 뿐이었다.
예술가들은 인형마다 자신의 도장을 새겨 자부심을 나타냈다. 많은 곳에서 수상인형극 극장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잇따른 전쟁을
치르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는 후기 레(Lê) 왕조 시기(1553~1708)에 지어진 쭈어 터이(Chùa Thầy) 파고다나 1775년에 지어진
동(Dong) 사원 정도에만 남아 있다.
전통 극장은 점점 사라지는 추세지만 수상인형극이 베트남의 고유한 전통문화로 알려지면서 공연은 더 확산되고 있다. 현대식 수상인형극 극장은 대형화되는 추세다. 하노이를 찾는 사람들은 호안 키엠(Hoàn Kiếm) 호수의 탕롱(Thang Long) 극장을 즐겨 찾는다. 북부 지역 고유의 문화유산이던 수상인형극은 이제 남부에서도 정기공연을 하고 있다.
삼모작이 가능한 베트남의 논에는 덜 여문 벼의 연두색, 익어가는 벼의 초록색, 수확을 앞둔 벼의 황금빛이 동시에 펼쳐진다. ‘삼색’ 찬란한
베트남의 논은 오랜 기간 사람들에게 쌀만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쌀만으로는 모자라 물을, 나무를, 자연 소품을 제공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거기에 상상력과 놀이를 더해 수상인형극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상인형극을 두고 ‘논의 영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유명한 맛집 "반미25" 샌드위치 가게
역시 유명 맛집 "분보남보" 비빔국수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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