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름은 돼지기름 아니고 식물성 쓰시는 거죠? ‘비로스키(몽골식 고로케)’엔 우유나 버터 안 들어가고요?”
지난 4월 12일 오후 1시쯤,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의 한 몽골채식식당에서 ‘한국채식연합’ 대표 이원복(45)씨가 메뉴판을 보며 꼼꼼하게 물었다. 종업원이 “당연히 식물성 기름이고요, 우유나 버터는 일절 안 씁니다. 마요네즈에도 두유만 써요”라고 답하자 그제서야 이씨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이제 주문할까요?”
이날 이씨와 채식연합 회원들이 주문한 음식은 볶음칼국수와 과일샐러드, 콩까스, 비로스키와 골라시(몽골식 볶음밥). 두유로 만든 수프와 몽골 차도 따라 나왔다. “고기를 쓰지 않아도 이렇게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콩까스’도 콩 단백질에서 만들어진 글루텐의 탄력 때문에 마치 고기 같은 맛을 내잖아요.” 이씨는 “우리는 그저 ‘우리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며 살 뿐인데 왜 사람들이 무조건 ‘까칠한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소외’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여 ‘먹고싶은 것 먹고 먹기싫은 것 안먹는’ 권리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때도 바로 이 자리뿐”이라고 말했다.
- “어린 시절 목격한 도축 장면 생생
우리 채식인에게 고기 강요는 폭력”
‘한국채식연합’은 2005년 서울시에 NGO로 등록된 채식주의자들의 모임이다. 2000년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채식나라’란 동호회로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회원 수 6700명의 ‘채식주의자들의 아지트’로 성장했다. 일주일에 한 번 토·일 중 하루 채식 점심 모임을 갖고 회원들끼리 채식 관련 정보를 교환한다.
대표인 이원복씨는 “한국채식연합은 채식의 장점과 생명존중, 건강증진, 환경생태보전, 기아해결, 생명사회 등의 가치를 좀 더 많이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채식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채식주의자에게 ‘고기를 먹어라’고 말하는 게 폭력이듯 모든 사람들의 식습관과 취향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25년째 채식을 하고 있는 ‘비건(vegan)’이다. ‘비건’은 돼지고기·소고기 등 살코기는 물론 생선, 계란, 우유 등도 일절 먹지 않는 그야말로 ‘순수한 채식인’을 뜻한다. 그가 채식을 하게 된 건 대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삼겹살을 먹으면서 ‘내가 뭘 먹고 있는 거지…’란 갑작스런 자책감 때문이었다고 했다.
어렸을 때 신촌 재래시장 옆에서 살았던 그는 돼지·닭이 도축 당하는 잔인한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고 했다. 이씨는 “당시엔 ‘아, 정말 끔찍하다’란 생각만 했는데 그게 은연중에 내 마음속 짐이 된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한 채식은 그에게 ‘운명’이 됐다.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지만 채식 생활은 계속 이어갔다. 교사들과의 삼겹살 회식에서도 홀로 밥과 된장찌개만 먹었고, 점심 때도 손수 만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그가 지나가면 학생들은 “와, 채식주의자 선생님이다!” 하며 깔깔댔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은 늘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아니, 왜 고기를 안 먹어요?’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에요?’라고 묻는다”며 “채식을 한다는 이유로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 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학교를 나와 ‘채식 사회운동가’로 변신했다. 채식이 심신의 건강은 물론 환경에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리겠다는 의지에서였다.
한국채식연합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 채식 인구는 전체 인구의 1% 정도인 50만명 정도다. 이 가운데 2분의 1 정도가 건강·미용 등의 이유로 채식을 하는 ‘실용적’ 채식주의자이고, 4분의 1이 동물 애호, 환경 보호 등의 이유에서, 나머지 4분의 1이 특정 종교나 명상·수행 등의 이유로 채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엄격하게 모든 육류를 거부하는 ‘비건’은 수천 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생선·우유 등은 먹는 ‘페스코(pesco) 베지테리언’이거나 살코기·생선은 빼고 우유·계란 등은 먹는 ‘락토오보(lacto-ovo) 베지테리언’으로 추정된다. 이씨는 “채식을 하는 단계는 중요하지 않다”며 “중요한 건 개인이 자신의 ‘식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자유롭게 보장되는 것이고, 사회가 이런 개인의 식습관에 대해 어떠한 부당한 강요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식당서 특별주문 하면 “안 팔아요”
회사에선 “왜 그리 까다롭냐” 왕따
“제가 가지고 다니는 식당 목록이에요. 이게 없으면 밥 먹기 참 힘들어요.” 동국대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서수연(여·32)씨는 만나자마자 가방에서 꼬깃꼬깃 접은 A4 용지 반만한 종이를 꺼내 펼쳐 보였다. 종이엔 채식 식사가 가능한 서울 시내 식당 주소 30여개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서씨는 “일반 음식점에선 주문할 때 ‘이건 빼주시고요…’ 하면 주인이 인상부터 확 찡그리며 싫은 티를 내거나 ‘그렇게는 안 파는데요’ 한다”며 “그럴 바엔 발품 좀 팔더라도 맘 편히 채식 식당에서 밥 먹는 게 낫다”고 말했다. 서씨는 살코기를 제외한 생선이나 달걀, 우유 등은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다.
서씨가 채식을 하게 된 건 2006년 호주 유학생활을 하며 배웠던 요가 때문이었다. 채식주의자였던 요가 강사가 ‘채식을 하면 운동 효과도 좋고 몸도 가벼워진다’고 해서 시작했던 게 지금은 일상적인 생활이 됐다고 했다.
서씨는 “호주, 대만 등 여러 국가를 여행했지만 그곳 식당엔 채식 메뉴도 따로 있고 채식 식당도 많아 밥 먹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며 “하지만 우리나라엔 일단 채식을 할 수 있는 음식점 자체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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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hoto 정복남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 사람들의 ‘아니꼬운’ 시선도 큰 부담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삼겹살’ 위주의 직장인 회식 문화를 마냥 외면할 순 없었기 때문. 고깃집에 앉아 흰 쌀밥과 밑반찬, 된장찌개만 먹는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이상한 시선부터 던진다고 했다. “수연씨는 입맛이 왜 그렇게 까다로워?”가 나중엔 “저거 노처녀 히스테리다”가 됐다.
서씨는 “‘페스코’인 나도 생활하기가 이렇게 힘든데 한국에서 완벽하게 채식을 한다는 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겠느냐”며 “먹고 싶은 음식을 먹겠다는 데도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는 건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박탈하는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광조(42)씨는 “내가 원하는 음식도 마음대로 못 먹는 나라에서 어떻게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지난 2001년 이씨는 단전호흡을 배우면서 처음 채식을 시작했다.
원래 고기를 잘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채식을 시작하고 난 뒤엔 고기 냄새만 맡아도 다소 역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이씨가 학부시절 전공(화학공학과)과는 다른 분야로 석·박사 과정을 밟게 된 것도 오로지 채식에 대한 ‘학구열’ 때문이었다.
이씨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 가운데 하나가 채식을 하면 영양 부족이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식물성 단백질과 식물성 지방으로도 충분히 인체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고, 채식엔 고기와 달리 아무런 독성도 없기 때문에 인체에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채식주의자’란 말 자체에도 우리 사회의 ‘편견’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주의자’라는 말에서부터 자신들을 하나의 이데올로기 집단으로 보려는 고정관념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는 “얼마 전 연구소에 취직한 한 친구가 ‘사회생활 하려면 어쩔 수 없더라’며 채식을 포기했을 때 ‘다름’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왕따’가 얼마나 심한지 절감했다”며 “우리는 그저 자신의 신체리듬과 생활습관, 취향에 따라 채식을 하게 된 ‘채식인’”이라고 강조했다
- “한국선 살기 힘들어 이민 준비까지
요리 배워 채식전문 식당 차릴 것”
채식 생활 2년차에 접어든 정재훈(27)씨는 현재 호주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2007년 우연히 인터넷에서 끔찍한 동물 도축 동영상을 본 후 채식을 선택했다는 정씨는 넉 달 전 가전제품 엔지니어 일을 그만두고 완전한 ‘비건’으로 돌아섰다.
정씨는 “사회 생활을 하다 보니 주변 환경이 육류에 너무 많이 노출돼 있어 도저히 채식을 할 수가 없었다”며 “‘채식주의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고기를 별로 안 좋아해서요’라는 말 정도밖에 못한다는 것도 너무 답답했다”고 말했다.
결국 정씨는 ‘채식주의자의 천국’ 호주로 떠나 요리학원을 다니며 채식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과정을 수료한 뒤엔 채식전문요리사가 돼 현지에 식당도 차릴 계획이다. 정씨는 “한국에선 내 생활과 식습관을 조화시키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호주는 이 둘을 다 이룰 수 있지 않느냐”며 “채식을 하다 보면 친하던 친구들이나 애인과도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국채식연합 회원들은 “편하게, 마음대로 채식을 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 지난 2월 청계광장에서 전세계 채식인들의 동시 캠페인 ‘지구를 바꾸는 2분’을 통해 각종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채식 시식회와 동영상 상영회도 열었다. 지난 3월 8일 설립된 사단법인 한국채식인협회의 주요 발기단체로도 참가했고 4월 19일 서울대에서 열릴 ‘채식 길거리 음식 페스티벌’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이원복 대표는 “어떤 사람에겐 ‘채식’이라는 게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며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해 채식인이든 비채식인이든 서로 ‘다르다’는 점을 조금씩만 더 이해해 준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채식과 영양
채식만으로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나. YES!
몸무게 60㎏인 성인이 필요한 하루 단백질은 약 60g, 즉 한 끼에 20g씩 단백질을 섭취하면 된다. 식물성 단백질은 고기 못지않은 단백질을 제공하고 대두의 단백질 함량은 소고기의 2배에 이른다. 한 끼에 대두 50g만 섭취하면 권장량을 모두 얻을 수 있다.
채식만으로 지방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나. YES!
고기에 많은 포화지방산은 일명 성인병을 유발하는 ‘나쁜 지방’이다. 식물성 식품으로 하루 37~73g의 지방을 섭취할 경우 아몬드, 잣, 해바라기씨, 땅콩, 호두, 참깨 등으로 충분히 섭취 가능하다. 호두와 콩엔 질 좋은 필수지방산이 가득하다. 오메가3 등도 생선이 아니라 콩, 들깨, 다시마, 미역 등에도 풍부하다.
채식만으로 5대 식품군을 모두 충족할 수 있나. YES!
20대 성인 남성의 경우 1일 권장섭취량 2400㎉에 필요한 탄수화물(1440㎉), 단백질(480㎉), 지방(480㎉)은 두유군, 채소군, 과일군, 곡류군에서 모두 섭취 가능하다. 동물성 식품에 농축된 콜레스테롤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고기·달걀은 모두 콩류로 대체 가능하다.
자료: 이광조 ‘우리 몸은 채식을 원한다’(2006)
- “한국선 살기 힘들어 이민 준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