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Picture/여행

Angkor Wat (앙코르 와트), Cambodia (캄보디아) 3/15~18/2019 #1

NaNo+AlphaGo 2023. 12. 6. 16:53

Angkor Wat (앙코르 와트)

 

 

 

유네스코가 지정한 불교 성지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사원.
캄보디아 씨엠립성의 성도 씨엠립에서 북쪽으로 약 4 km 정도 떨어진 곳,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 톰(Angkor Thom)에서는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앙코르(Angkor)는 크메르어(語)로 왕조를 뜻하며 와트(Wat)는 사원을 뜻하기 때문에 왕조의 사원이라고도 한다. 가장 높은 3층의 중앙 성소까지의 높이는 총 65m이고 계단이 매우 가파른 것이 특징이다. 

이 유적이 위대한 이유는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는 물론이고 오래 전에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음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고도의 정교한 건축기술에 있다. 또한 사람의 손에서 방치되는 역사를 겪으며 덩굴과 나무 등이 사원의 벽을 뚫고 자라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건축물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며, 문명의 무상함이라는 불교적 메세지와 인간과 자연이 큰 시간 단위에서 결국 어우러지는 우주의 질서를 몸소 나타낸다. 앙코르 와트 건물은 동향으로 지었지만, 건물의 축을 정동쪽이 아니라 시계 방향으로 0.5도 틀었다. 이는 실수가 아니다. 주야평분시(晝夜平分時), 즉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과 추분 무렵 서쪽 통로에서 일출을 보면, 땅 위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사원의 중앙 탑 꼭대기를 지나가는 듯이 보인다. 만약 건물을 정동향으로 지었다면 태양이 떠오르면서 남쪽 하늘로 움직이기 때문에 중앙탑과 태양이 틀어져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없다. 직접 보면 장관이다. 중세 크메르인들의 고도의 지식과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역사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제국의 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1122년부터 1150년까지 28년에 걸쳐 세웠다. 불교 성지로 알려진 지금과는 달리 사실 앙코르와트는 힌두교 사원인데, 당시 크메르 제국의 국교가 힌두교였기 때문이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이만한 거대한 사원은 시바 신에게 봉헌하던 전통을 깨고 앙코르와트를 질서의 신 비슈누에게 바쳤다. 비록 수리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와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6] 앙코르와트는 완공된 이래로 국왕 직속의 핵심사원이자 크메르 제국의 가장 중요한 사원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완공되고 30년도 되지 않은 1177년, 크메르 제국은 인근의 참족에게 공격을 당해 치명타를 입었다. 이때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도 이때 참족에게 약탈당해서 크메르 제국은 나라가 휘청거려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나마 중흥군주 자야바르만 7세가 다시 제국을 회복하고 수도를 앙코르 톰으로 옮겨 천도하면서 크메르 제국은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꿨는데, 그동안 힌두 신들을 그렇게 믿어왔는데도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으니 힌두교 신앙심이 완전히 떨어져버렸던 것.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불교로 바꾸면서 앙코르와트에 있던 각종 힌두교 부조와 석상들도 상당수 불상으로 대체했다.

안타깝게도 중흥군주 자야바르만 7세 이후로 크메르 제국은 끝없이 쇠락했다. 인근의 태국, 베트남 등에 치이면서 고대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허구한 날 공격당하는 약소국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앙코르에 세운 각종 사원들과 건축물들도 모조리 잊혔고, 앙코르와트 역시 17세기 말 이래로는 거의 사람이 찾지 않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워낙 면적이 엄청난 건축물이라 아예 잊히진 않았고, 일본 순례자들이 찾아와 작은 초막을 짓고 살기도 했다.[7] 이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가톨릭 수도자 안토니오 다 마달레나도 1586년에 이 곳을 찾아와 방명록을 남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앙코르와트가 아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물론 앙코르와트가 완전히 사람들에게 잊히진 않았어도 어디까지나 일부 호기심 많은 탐험가나 여행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다. 동남아인들을 제외하면 세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앙코르와트의 존재조차도 몰랐다. 이렇게 방치된 앙코르와트를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알린 사람이 그 유명한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61)이다.[8] 프랑스 출신 박물학자 앙리 무오는 1860년에 캄보디아를 탐험하는 과정에서 앙코르와트를 방문했고, 그가 쓴 여행록이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앙코르와트는 마침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앙리 무오는 '이 신전의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신전이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비견될 정도'라고 극찬하면서 앙코르와트를 유럽인들에게 소개했는데, 이 여행록이 이색적인 신세계에 관심이 많던 당대 유럽인들의 입맛에 딱 맞았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는 얼마 지나지 않은 1863년 캄보디아를 보호령, 즉 사실상 식민지로 삼았다. 의도치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의 영토가 넒어지기도 했는데, 유적에 관심이 많던 프랑스가 크메르 유적들을 모조리 손에 넣기 위해서 당시 태국령이던 씨엠립과 바탐방, 시소폰 일대를 침공해서 합병한 후 캄보디아령에 붙여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프랑스인들의 앙코르 유적 사랑은 계속돼서 1931년에는 앙코르와트의 모형을 파리 만국박람회에 통째로 전시하기도 했고, 수많은 학자들이 앙코르와트를 방문해 연구와 발굴작업을 계속했다. 그동안 앙코르와트에 무성하던 초목과 나무들을 모두 뜯어내고 보존 처리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당연히 프랑스인들이 앙코르와트에 좋은 일만 한 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선 동남아인들이 이렇게 위대한 건축물을 지었을 리 없다며 고대 로마의 후예들이 남겼다든지 심지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후예가 남아 만들었다든지 하는 별별 억지 주장이 다 나왔다. 알렉산드로스 의문의 힌두교도행 심지어 처음 이 유적을 발견한 앙리 무오도 캄보디아인들이 이런 유적을 만들었을 리 없다고 의심했을 정도. 그리고 프랑스는 여기 있는 문화재들을 상당수 약탈해 뜯어가 루브르 박물관에 두기도 했는데, 심지어 훗날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작가 앙드레 말로도 이곳의 문화재를 훔쳐간 전력이 있었는지라 이 사실이 그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캄보디아는 1953년 11월 9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캄보디아 내전의 발발, 크메르 루주라는 최악의 살인집단의 득세 등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앙코르와트 역시 좋은 꼴은 못 봤다. 특히 문화재 보존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크메르 루주가 그나마 앙코르와트에 남아있던 목조 건축물들을 모조리 잘라 장작으로 썼고,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군 사이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곳곳에 총탄이 박히는 등 앙코르와트는 이때 꽤나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게다가 앙코르와트는 오히려 전쟁이 끝난 80년대와 90년대에 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유물에 눈이 돌아간 태국인 도굴꾼들이 전후 캄보디아의 치안이 허술해진 틈을 타 앙코르와트에서 뜯어갈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뜯어가버렸기 때문. 심지어 기껏 복원해놓은 부분까지 도둑에게 훔쳐졌다.

199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나, 전쟁과 약탈로 인해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소실, 전체 유적지의 70%가 도저히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의 왕궁에 있는 유물 천여 점이 도난 및 파괴되는 등 유적지의 훼손이 매우 심각하다. 실제로 해자의 다리와 벽에 기관총으로 생긴 홈을 볼 수 있을 정도. 이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는 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전인 1982년에 유적지 복구를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9] 다만 2000년대 들어서 캄보디아의 치안이 그럭저럭 안정화되고 난 이후, 앙코르와트가 사실상 캄보디아의 상징이기 때문에 조금씩 복구와 유지 작업에 시동을 거는 중이다.

 

건축

앙코르와트는 전체적으로 해자와 외벽, 그리고 사원 본체로 구성된다. 앙코르와트를 둘러싼 해자는 폭이 무려 190 m, 둘레는 5 km에 이르고 깊이는 대략 4 m 정도로 꽤나 깊다. 해자는 원래 사원으로 상징되는 탈속적인 공간과 세속적인 현세를 구분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는데, 의도한 바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앙코르 와트의 기반을 단단하게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사원 아래의 지하수 수면이 너무 높아지지 않도록 조절해 사원 기단이 물러지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 뿐만 아니라 몇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주변의 열대우림이 사원을 완전히 집어삼키지 않도록 1차적으로 차단해주기도 했다.

해자를 건너 앙코르와트로 들어가는 다리는 해자 서쪽에 있다.[10] 석판으로 포장된 다리에는 석조 사자상이 양 옆을 지키고 있다. 원래는 이 다리 앞에도 건물과 문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졌다고 추정된다. 동쪽에도 들어가는 다리가 있지만 사실상 흙길이 깔린 제방에 더 가깝다. 다리를 따라 해자를 건너가면 고푸람[11]이 나온다. 해자에서 약 30 m 정도 떨어진 곳에 앙코르와트의 외벽과 고푸람이 있는데, 정문이 있었던 서쪽의 고푸람이 가장 거대하다. 서쪽에는 윗부분이 살짝 무너진 고푸람이 총 3개 있는데 개중에 중앙에 있는 고푸람이 가장 크다. 중앙 고푸람 내부에는 팔이 여러개 달린 비슈누 석상이 있다. 앙코르와트가 힌두 사원이던 시절에는 아마 중앙 탑에 안치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신상이다.

앙코르와트 외벽은 그 길이가 무려 가로 1024 m, 세로 802 m에 달하며 높이는 약 4.5 m 정도로 꽤 높다랗다. 외벽은 회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바깥쪽 부분에는 사각기둥들이 열을 지어 서있고 안쪽 부분은 벽으로 막혀있다. 기둥들 사이의 천장은 연꽃으로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있으며 벽면에는 웃는 압사라[12]의 모습이 조각되었다. 특히 이 서쪽 고푸람에는 앙코르와트에서 유일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고 유명한 압사라 부조가 있다. 어쨌든 외벽은 총 82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둘러싸는데, 원래는 이 외벽 안에 빽빽하게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야 목조로 만든 궁전과 건물들이 죄다 썩어서 돌로 만든 가장 중앙의 사원만 남았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외벽 안에 발 디딜 틈도 없이 건축물들이 들어섰다고 생각하면 된다.

 

서쪽의 고푸람을 통과하면[13] 석조 보도를 따라서 쭉 중앙 사원으로 향하면 된다. 이 보도의 길이는 무려 350 m에 달하고 옆에 나가의 모습을 조각한 난간들이 조각난 채로 세워져 있다. 보도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양 옆에는 '도서관'이 한 채씩 있다. 동서남북을 맞추어 문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앙코르 와트의 전성기 때는 도서관이 아니라 제사용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서관 뒷편에는 인공 연못이 한 개씩 팠는데, 가로 50 m, 세로 65 m로 꽤나 널찍하며 왼편 연못은 물이 차있으나 오른편 연못은 상대적으로 말라있다. 당시에는 사원에 들어가기 전 이 곳에서 몸을 씻거나 제사용기들을 닦곤 했다. 사원 바로 앞의 십자형 테라스는 '영광의 테라스'라고 부르는데 나가로 조각된 난간과 사자상들이 있다.

보도를 걷다보면 마침내 사원 본건물에 도착할 수 있다. 중앙 사원 본체는 크게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갈수록 높아지며 맨 마지막 3층에 중앙 탑이 위치하는 구조이다.[14] 모든 층에는 사면의 정중앙에 고푸람들이 1개씩 세워져 있으며, 특히 2층과 3층에는 중앙뿐만 아니라 모서리 부분에도 고푸람이 1개씩 세워져 있다. 사원이 서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세워졌기에 사원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동쪽으로 치우친 구조다. 또한 왕이 들어올 때 가장 잘 보이는 부분이 정문과 가까운 서쪽 부분이었던 터라 서쪽 부분에 가장 정교하고 자세한 부조들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또한 왕이 주로 사용했던 서쪽의 계단들이 다른 방향의 계단보다 상대적으로 경사가 낮게 만들어진 것도 특징이다.

사람들이 앙코르와트의 겉모습만 보고 채석장에서 채굴한 돌로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겉부분만 회색 사암을 사용해 만들었고 그 안은 적갈색의 라테라이트 벽돌로 채워넣은 구조이다. 라테라이트는 산화철을 함유하고 있는 적갈색 토양으로 땅 속에서는 부드럽지만 땅 밖에서는 철분 때문에 습기가 말라 굳으면서 굉장히 단단해진다. 가공하기는 쉽고 건물을 지은 나중에는 단단해지는 특성 때문에 아열대 지방에서는 라테라이트를 이용한 경우가 많았고, 앙코르와트 역시 라테라이트를 이용해서 지었다. 앙코르와트 유적을 잘 보면 일단 라테라이트 벽돌을 쌓은 다음 겉에는 사암 덩어리를 깎아서 덮었다. 물론 라테라이트를 쌓지 않고 통째로 사암으로 만든 부분도 일부 존재한다.

1층 회랑은 가로 215 m, 세로 187 m이다. 2층과 3층 회랑과는 달리 모서리 부분에 고푸람 대신 작은 파빌리온이 하나씩 있다. 회랑은 사원 외부로 뚫렸고 사각 기둥들이 회랑을 받친다. 1층을 2층과 연결하는 통로가 서쪽에 있는 십자 회랑인데, 이를 '1천 신령들의 홀(Hall of Thousand Gods)'라고 부른다. 순례자들이 이 곳에 불상이나 부조를 새겼으나 싸그리 약탈당해서 현재는 몇 개밖에 남지 않았다. 특히 1천 신령들의 홀에는 순례객들의 선행에 대한 글들이 유난히 많은데, 대부분은 크메르어지만 일부 버마어 일본어도 있다. 십자 회랑 사이의 공간에는 한때 물이 차 있었다고 추측된다. 남북쪽의 회랑은 도서관이다.

 

참고로 앙코르 와트에는 층과 층 사이마다 '중간단'이라는 독특한 구조가 있다. 주 목적은 1층과 2층을 완만한 경사로 연결시켜 사람들이 더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워낙 경사가 가파라서 자칫하면 제대로 오르지도 못할 수 있었기 때문. 중간단을 거쳐 1층에서 올라가면 2층 회랑이 나온다. 2층 회랑은 가로 115 m, 세로 100 m이며, 메루산(수미산)을 둘러싼 거대한 바다를 상징한다. 2층 회랑에는 압사라들이 대략 4명 정도 짝을 이루어 춤을 추는 모습을 새겼다. 사면에 3단의 계단이 있어 3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이 2층과 3층 사이 계단들은 경사가 높기로 소문난 앙코르와트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매우 경사가 가파르다.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

3층 회랑은 2층에서부터의 높이가 약 40 m에 달할 정도로 그 경사가 극히 가파르게 올라간다.[16] 정사각형 모양의 단에는 모서리에 각각 2개씩, 중앙에 1개씩 총 12개 계단이 있는데, 각 계단에는 단이 약 40여 개 정도가 있고, 이 경사가 70도 정도로 매우 가파를 뿐만 아니라 폭도 보통 계단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이러한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취하는데, 크메르인들이 사원을 지을 때 바로 이와 같은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17]

3층의 정사각형 모양 기단 둘레는 60 m이고, 모서리 쪽 계단이 올라오는 부분에 고푸람들이 1개씩, 그리고 정중앙에 가장 거대한 고푸람이 1개가 있어 총 5개 고푸람이 있다. 2열 기둥으로 장식된 지붕 덮인 회랑이 외벽 역할을 하는데, 이 회랑이 십자형 통로와 연결되어 자연스레 중앙의 성소로 향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맨 중앙에 있는 고푸람은 그 높이가 지면에서 65m나 되는데, 특히 크메르 특유의 그 솟구치는 듯한 장식 때문에 더더욱 그 높이가 높아 보인다. 본디 이 성소에는 비슈누 상이 있었으나 이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비슈누가 쫓겨나고 그 자리에 불상이 놓였다. 허나 원래 있던 불상은 진작에 도굴당해 사라졌다. 그나마 1934년에 고고학자 조지 투르베가 중앙 성소 아래에서 모래와 물이 찬 비밀 구덩이를 발견했지만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고.[18] 현재는 이 중앙 성소 한가운데에 새로 불상을 안치해 놓았다.

 

투어안내

패키지 투어라면 여행사에서 일정이 만들어져 있어 따라서 소화하면 되기에 자유여행자들의 경우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자유여행자들의 경우엔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앙코르 유적군을 묶어서 투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크게 스몰 투어와 그랜드 투어로 나눌 수 있다.

  •  
  • 스몰투어는 일반적으로 오전에 앙코르 톰[25]을 시작으로 타 프롬[26]을 본 뒤 오후에 앙코르 왓 사원을 구경하는 일정이다.
  • 그랜드 투어는 프레아 칸 사원을 시작으로 닉뽀안, 따 솜 사원을 거쳐 동 메본 사원과 프레룹 사원을 도는 일정이다. 이 일정은 빠르게 돈다면 반나절이면 충분하나 보통 반티아이 스레이를 추가해 시간을 맞춰 프레룹 사원에서 일몰을 보는 일정으로 많이 소화한다.

 

일반적으로 현지 여행사를 통해 조인해서 가거나, 툭툭 기사를 고용해서 코스를 도는 방법, 한국어가 가능한 캄보디아인 가이드 고용, 현지 한국업체의 한국인 투어상품, 이렇게 보통 4가지를 많이 이용한다.
  •  
  • 현지 여행사 조인은 차량을 통해 이동하기 때문에 이동간 차량 에어컨을 쐴 수 있고 가격이 싸다는 장점이있으나 가이드가 일반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며 일정대로 맞춰가야한다는 단점이 있다.[27] 그러나 천천히 말하는 영어는 알아들을 수 있고, 기초적인 질문정도는 가능하다면 한국 가이드보다 현지 가이드가 낫다. 그 나라의 유적이니만큼 더 많은 지식이 있을 뿐더러, 조각이나 판화 등 문화를 반영하는 유적들에서 경험이 담긴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수 있다.
  • 툭툭 기사 고용은 툭툭 이동시 도로에 날리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며, 툭툭 기사는 사원에 데려다 주고 출구에서 기다리고, 가이드는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어찌 보면 가격이 가장 쌀 수 있기 때문에 많이들 선택 한다.[28]
  • 한국어가 가능한 캄보디아인 가이드 고용은 한국어가 가능하면서 캄보디아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캄보디아인의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국어가 약간은 부족한지 가끔 제대로 된 설명 혹은 대답을 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29]
  • 한국인 투어상품은 여러 명이 함께 투어한다고 가정시 1인당 가격이 가장 비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제대로 된 한국어 가이드를 받을 수 있고 요청사항에 대한 피드백이 빠르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나무위키 백과사전